[양산박의 세상만사] 얼마 전 끝난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등장한 서울 쌍문동 골목길은 그 시절 아련한 추억으로 떠오르면서 “어렵더라도 그 때가 좋았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석유곤로에서 양은냄비로 밥을 짓고, 겨울을 나기 위해 연탄을 들여놓고, 먹을거리가 있으면 아랫집과 윗집 오가며 나눠 먹던 그 시절이었습니다. 골목길 대문 앞 평상에서는 동네 모든 소식이 오고가기도 합니다.
물론, 부족한 것 투성이었습니다. 온 가족이 방 하나에서 자고, 보온밥통이 없어 아랫목에 아버지 밥그릇을 묻어두고, 도시락 김칫국물이 흘러 책가방과 책들이 빨간색으로 물들기도 했습니다. 연탄가스를 마시고, 어질어질하던 기억. 할머니는 골무를 끼고 구멍 난 양말을 꿰매주시기도 했지요.
성남은 어떠했나요?
스카이 콩콩을 만들었던 대영타이어, 언니․누나들이 취직하던 콘티빵과 삼영전자. 상대원 공단은 24시간 불이 꺼질 줄 몰랐습니다. 덕분에 월급날이면 종합시장을 중심으로 불야성을 이뤘고, 개천가에는 포장마차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어 하루의 고단함을 달래주는 안식처 역할을 담당했지요.
서민들의 문화를 담당한 영화관도 즐비했지요. 대원극장, 성남극장, 중앙극장, 제일극장, 동영극장 등 10여 곳이 넘는 극장들이 개봉영화, 동시상영, 성인영화 등을 상영했습니다. 덕분에 학생들은 시험이 끝나면 반강제(?)로 영화를 봤고, 어두컴컴한 곳에 담배 불빛이 비추자 학생주임 선생님과 교련선생님이 출동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성남시민회관은 성남 모든 지역의 큰 행사를 도맡았던 장소입니다. 90년대 중반까지 미스성남을 선발하던 장소로 기억됩니다. 미인 선발을 보기 위해 인산인해를 이뤘고, 성남 지역의 유명 미용실은 자존심을 걸고 미인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출전 미인들은 “00미용실 000원장님께 감사드립니다”라는 단골 멘트를 잊지 않았습니다.
종합시장 인근 ‘나드리에’라는 레스토랑을 기억하지요. 모든 극장에서 영화 상영 전에 광고에서 “나드리에로 오십시요!”라고 외치던 박문수 사장. 나드리에 신화를 만들어 가며, 외식문화를 꽃피웠던 분입니다. 어렵사리 구한 30% 할인권으로 ‘칼질’을 할 때면 남부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과일치킨으로 유명한 ‘풍차’ 호프집. ‘노래마을’을 탄생시키며 운동권들의 아지트였던 ‘윤회’까지.
왜 자꾸만 그 때가 그리운지 모르겠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입니다. ‘응답하라 1988’이라는 드라마 속 주인공인 듯 착각 속에 빠져 들게 하고, 수없이 ‘청춘’이라는 노래를 반복해 듣고, 자꾸만 초등학교 친구들이 가득한 ‘밴드’에 손이 갑니다. 친구들을 만나면 그 때로 돌아가 “너, 00했던 것 기억나니?” 물어보고, 몽둥이 들고 다니던 무서웠던 선생님들의 별명이 주마등처럼 스쳐갑니다.
두 번째로는 경제가 어려워졌기 때문입니다. 없어도 행복했던 때가 있었는데, 지금은 어렵기만 하고 행복하지는 않습니다. 힘들다고 손 내밀면 잡아주지도 않고, 저하나 살기위해 아등바등하는 처지입니다. 화려했던 종합시장 대로변은 ‘땡 처리 가게’가 점차 늘어나고, 뒷골목은 ‘사행성 오락실’이 차지했습니다. 얼마 전까지 삼겹살을 팔던 곳이 해산물 가게로 변하고, 아주머니 혼자 하는 호프집은 문 여는 시간이 점차 늦어지고, 미용실 새댁은 덩그러니 혼자 매장을 지킵니다.
지하상가는 임대문제 때문에 법정 소송을 진행 중이라 어수선하고, 마을 입구를 지키던 느티나무 같았던 성남의 상징 ‘종합시장’ 건물은 허문 뒤 수년째 빈 공터로 남아 주차장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뒷골목으로 들어가 볼까요. 오랫동안 종합시장 인근을 지켜온 곳은 ‘진성삼계탕’, ‘윤회’, ‘순창떡볶이’ 정도 뿐. 20년 넘게 명성을 이어온 ‘춘천닭갈비’는 버티지 못하고 가게를 좁혀 인근에서 장사를 이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 종합시장 인근 뒷골목. |
‘만복당’은 성남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분식집’을 말합니다. ‘만복당’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할까요?
자세히 들어다보면 대기업이 운영하는 음식점, 유통매장, 영화관, 심지어 동네 슈퍼마켓까지 장악 당하고 있습니다. 소비자 입장에서 저렴하게 이용하는 이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자본주의에서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나도 모르게 성호시장, 중앙시장, 상대원 시장은 불편하다고 판단하고, 순창떡볶이보다 죠스떡볶이의 매운 맛이 땡기고, 오복슈퍼보다 주차장이 넓은 농민마트를 찾는지 모릅니다.
이제 갓 스무 살을 넘긴 청년이 “버스정거장 이름이 ‘오복슈퍼’라고 나와서 깜짝 놀랐어요. 오히려 신구대 후문이라는 말이 뒤에 나오더라구요”라고 말했습니다. 젊은 친구에게는 ‘오복슈퍼’라는 말이 낯설지 모릅니다. 하지만 금광동, 은행동 일대에 사는 성남 사람들에게는 낯설지 않은 이름입니다. ‘오복슈퍼’는 단순히 물건을 파는 가게 이름이 아니라, 그 동네를 대표하는 지명으로 인식되어졌기 때문입니다.
성호시장 앞에서 연탄난로 위에 수북이 쌓아 팔던 ‘곤달걀’. 어머니는 형제들이 많은 탓에 시장에 갈 때마다 막내 손을 잡고 ‘곤달걀’ 몇 개를 사주셨습니다. 가끔 끔찍한(?) 경우가 발생하기도 했지만, 나만의 특권을 누리던 고소한 맛을 잊을 수 없습니다. 이로 인해 지금도 성호시장은 어릴 적 추억이 묻어나는 ‘노스텔지어’와 같은 장소입니다.
이런 추억이 사라지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권이 살아나야 합니다. 특히, 골목상권이 살아나야 합니다. 단대오거리를 중심으로 금광동 신구대 방향의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곳에도 맛있는 집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중앙동쪽은 얇은 대패 삼겹살과 파 무침이 유명한 ‘철뚝집’을 물론이고, 만화가 아저씨의 작품으로 꾸민 ‘고기시장’ 김치찜은 입소문이 나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습니다. 논골 방향 ‘숙이네 떡볶이’는 줄을 서지 않으면 맛을 볼 수 없을 정도입니다.
거창한 프로젝트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 추억을 간직한 곳을 한 번만 찾아주면 됩니다. 상권활성화 한다고 이벤트 회사처럼 팡파르를 울리고, 서울에 있는 인디밴드를 굳이 성남에 출연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고, 혹시 불편한 점은 없는지를 살펴보면 됩니다.
몇 해 전 찾은 아산시의 온양시장이 기억납니다. 시장 입구에 따뜻한 온천물이 흐르게 만들어 누구나 발을 담글 수 있도록 했습니다. 전주는 대로변보다 뒷골목을 살려 골목마다 특색 있는 아케이트를 씌웠습니다. 대구 동성로는 차를 막고 골목마다 젊음이 취향에 맞도록 가지각색 점포들이 줄지어 있습니다. 없던 것을 새롭게 만들지 말고, 성남을 정확하게 진단해 가장 성남답게 만들어 보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