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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 안창호 선생 묘비, 43년 만의 귀환유지(遺志)대로 43년 만에 망우리공원으로 재이전
유일환 기자  |  presslove@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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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3.01  15: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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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당신문] 서울 강남구 도산공원에 위치한 도산 안창호(1878~1938) 선생의 묘비가 43년 만에 본래의 자리인 망우리공원에 재이전 돼, 오는 3월 1일 오후 3시 기념행사 및 제막식을 갖는다.

   
▲ 지난 2월 25일 망우리 공원에 이전된 묘비의 모습.
1938년 도산 안창호 선생은 서거 직전, 제자이자 비서였던 유상규(1897~1936)선생이 묻힌 망우리공원을 장지로 유언하였다. 유상규 선생은 상해임시정부에서 도산 선생을 보좌하였고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의 구심점으로 자리 잡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유상규 선생이 일제의 탄압으로 학업인 경성의전을 중퇴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 도산은, 귀국하여 학업을 마치고 조선 백성들에게 의료 계몽활동을 당부한다.

도산의 명을 받든 유상규 선생은 1925년 경성의학전문학교에 복학하여 1927년 졸업과 동시에 의료봉사 활동을 진행한다. 하지만 1938년 환자로부터 감염된 단독(丹毒: 연쇄상구균)으로 사망한다. 유상규 선생 사망 후, 장례는 대전형무소에서 병보석으로 출감된 도산 안창호 선생이 주제하였다. 그 후 서대문 형무소로 재수감된 도산선생은 옥고 끝에 제자이자 동지였던 유상규 선생 곁에 묻히기를 유언하며 서거하였다.

1938년 망우리공원에 안장된 도산선생의 묘역에 한국전쟁 후인 1955년 현재의 묘비가가 세워졌고, 1973년 도산공원으로 부인 이혜련 여사와 묘가 합장을 위해 이장될 때 함께 옮겨진 것이다. 위와 같은 사실은 여러 자료에서도 확인된다. 도산의 조카딸 안성결이 당시 미국에 있던 도산의 부인 이혜련 여사에게 보낸 서신(1938. 독립기념관)에는 이런 글이 있다. “숙부님 모신 자리는 퍽 훌륭합니다. 서울서 삼십리 가서 망우리 큰 산인데 남행 판이고 분묘 아래는 숙부님 계실 때 제일 사랑하시던 아들 같은 유상규 씨의 무덤이 있습니다.” 그리고 잡지《삼천리》(1938년 5월호 ‘도산의 유언’)에서도 도산이 임종시에 평안도의 선산에 묻지 말고 망우리 유상규의 옆에 묻히기를 원했다는 사연이 기록되어 있다.

검은 오석(烏石)의 비석은 높이가 2.6m(기단 포함)로 1955년에 도산기념사업회가 세운 것인데 비문은 춘원 이광수가 납북 전에 지어 놓은 것을 서예가 원곡 김기승이 썼으며 앞면의 제자(題字)는 서예가 소전 손재형이 썼다.

 민간단체와 자치단체의 협력을 통해 46년 만에 묘비 재이전 성사

   
▲ 도산공원에 보관된 도산묘비.
도산공원의 묘비를 망우리공원으로 재이전이 본격화된 것은 2014년 서울시의 요청으로 한국내셔널트러스트가 추진한 ‘망우리공원 인문학의 길 연구용역’이 계기가 되었다. 한용운, 방정환, 이중섭, 박인환, 조봉암 등 근현대 역사인물이 다수의 묘역이 조성된 망우리공원을 통해 삶에 대한 의미를 반추하는 공간으로 조성하기 위한 연구이다. 

이 작업의 일환으로 한국내셔널트러스트가 일반시민과 초중학생이 참여하는 ‘묘역따라 역사여행’을 진행하게 된다.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이며 계몽운동가로만 알려져 있던 도산선생의 인간적인 면모와, 사제지간을 뛰어넘는 깊은 우정에 많은 이들이 감동을 느끼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뒤늦었지만, 도산공원에 보관된 舊묘비라도 본래의 자리인 망우리공원으로 이전해야 된다는 바람이 제기되었다.

한국내셔널트러스트는 연구용역 보고에서 도산선생 묘비이전을 서울시와 시설관리공단에 제안하였고, 2015년 7월, 흥사단과 도산기념사업회에도 적극 협조의사를 밝힘에 따라 오는 3월 1일 묘비 재이전 행사가 성사된 것이다. 3월 1일 행사는 한국내셔널트러스, 흥사단, 도산기념사업회가 주관하며 서울시설관리공단이 후원한다. 

(묘비 한글번역)

<앞면>

學不厭 格物致知 欲復祖國   학불염 격물치지 욕복조국

誨不倦 樹德立言 爲寧斯民   회불권 수덕립언 위녕사민

直無僞 接人以愛 春風和氣   직무위 접인이애 춘풍화기

公無私 作事以誠 秋霜嚴威   공무사 작사이성 추상엄위

 

배우는 일을 마다하지 않고, 사물을 대할 땐 앎을 지극히 하며, 조국의 광복을 도모하다.

가르치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고, 덕을 실천하며 훌륭한 글을 남겨, 백성을 편안케 하다.

생각이 곧아 거짓이 없으며, 사랑으로 사람을 사귀어, 춘풍 같은 온화한 기운이 퍼지다.

공을 앞세워 사욕이 없으며, 진정으로 일을 추진하여, 추상 같은 위엄을 갖추다.

 

<뒷면>

도산 안창호 선생은 단기 4211 무인(1878) 10월 6일 대동강 하류 도롱섬에 나시니 부 흥국 모 황씨의 3남으로 문성 안유 선생의 후손이라 선대는 평양부 남촌 노남에서 유학을 업으로 하다. 3세에 입학하야 당년 3권서를 떼다. 집은 가난하나 스승을 좇아 학문을 폐함이 없더니 17세 갑오(1894)에 신학문을 구하야 상경, 미국인 언더우드의 학교에 들어가다. 19세 병신(1896)에 독립협회에 가입, 서재필 박사의 훈도를 받고 평양에서 국권독립과 생활혁신의 사상을 고취하다. 쾌재정 연설은 그때이라. 구국의 길이 교육에 있음을 역설하야 고향에 전진학교를 세우니 사립학교의 효시라. 수 이랑의 황무지를 개간하야 노모 봉양의 자산으로 삼아 장형 치호에 바치고 22세(1889)에 부인 이씨와 함께 도미하다. 상항과 나성에서 고학 중에도 동포를 심방하야 원조와 지도를 폐하지 아니하니 모두 열복하다. 당시 하와이부터 다수 동포가 미 본토에 도미하야 일본인 노동 알선자의 착취에 신음함을 보고 이강, 정재관 등 동지와 꾀하야 취직알선, 생활지도를 목적으로 공립협회를 조직하고 인하여 공립신보를 창간하니 북미대한인국민회와 신한민보의 전신이라. 병오(1906) 29세에 환국하니 보호조약 익년이라. 국운만회의 유일한 길은 교육과 산업의 진흥임을 역설하야 신민회와 청년학우회를 창립하니 실로 아국의 조직적 민족운동의 시초라. 당시 저명하던 애국자를 망라하였고 3‧1운동의 지도자 거의 다 이에서 나오니라. 평양 대성학교를 세우고 몸소 교장이 되어 인격주의의 교육에 신기축을 열더니 융희 3년(1909) 안중근 사건으로 일본헌병대에 구금되었다가 다음 해 봄에 석방되었으나 일본과 협력하는 정당과 내각을 조직하라는 두 차례의 일본의 요청을 일축하고 망명의 길을 떠나다. 청도회의와 해삼위회의에서 불행히 독립운동 방략에 관하여 합의를 보지 못하고 선생은 미주로 돌아와 가주(캘리포니아)에서 수로 굴착 인부로 생계를 삼으니 흥사단의 구상이 이때에 되다. 곧 동포의 간청으로 국민회를 강화하야 몸소 중앙총회장이 되니 회세 크게 진작하여 하와이 멕시코와 멀리 시베리아 북만주까지 미쳐 엄연히 태극기를 지키는 한 국가의 모습이 있더라. 제1차세계대전이 끝나매 국민회는 이승만 박사에게 구미 외교를, 선생에게 원동 동포단결을 위임하니 선생은 기미(1919) 5월 상해에 상륙하야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총장에 취임, 국무총리 이승만 박사를 대리하야 정청을 열고 동지를 규합하고 3계 정부(상해, 해삼위, 한성)를 통합하고 독립운동 방략을 제정하다. 45세 임술(1922)에 대독립당을 발기하고 만주에 유세 중, 일본 관헌의 요청으로 길림에서 체포되더니 중국지사의 궐기로 난을 면하다. 48세 을축(1925)에 필리핀을 방문한 뒤 북미 각지 동포를 순회 유세하고 다시 중국에 돌아와 남경에 동명학원을 설립하고 대공주의의 정치 경제 도덕의 이상을 설하다. 55세 임신(1932)에 상해 폭탄 사건으로 일본관헌에 체포, 본국에 호송되어 대전감옥에서 4년형을 치루고 출옥 후, 강서 송태에 산장을 지어 은거하야 자아혁신 민족혁신을 설하더니 정축(1937)에 동우회 사건으로 수백 동지와 피검, 서대문감옥에서 발병하야 경성대학병원에서 순국하시니 무인(1938) 3월 10일 자시오 향년 61세이라, 서울 동쪽 교외 망우리묘지에 가매장하였다. 부인 이씨와 필립 필선 필영의 세 아들, 수산 수라 두 딸이 북미에 있다.

단군 기원 4288년 을미년(1955) 9월  일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건립

춘원 이광수 찬

소전 손재형 전

원곡 김기승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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