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그 이후

녹색당 논평

유일환 기자 | 기사입력 2019/09/28 [20:55]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그 이후

녹색당 논평

유일환 기자 | 입력 : 2019/09/28 [20:55]

- 모든 것이 변했으나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다

   
 

[분당신문] 9월 28일은 ‘안전하고 합법적인 임신중지를 위한 국제 행동의 날’이다. 원치 않는 임신을 피할 수 있는 것, 원할 때 임신을 초기에 안전하게 중지할 수 있는 것은 여성이 자신의 몸과 삶에 대해 갖는 최소한의 결정권이다. 안전하고 합법적이며 적절한 비용의 임신중지가 권리로서 보장되지 않으면 여성의 일상은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질 위험을 안는다.

지난 4월 ‘낙태죄 헌법불합치’라는 역사적 결정 이후에도 우리 사회는 별다른 제도적 행정적 변화가 없다. 인권·시민·사회계의 고민과 토론은 꾸준하나 국가 차원의 논의는 전무하다시피 하다. 단순히 ‘낙태’가 범죄냐 아니냐를 넘어서 성과 재생산 전반의 건강과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사회적 숙제는 산적해 있으나 정부와 국회는 굼뜨고 무책임하다.

복지부와 식약처는 당장 유산유도제 도입 절차에 들어가야 한다. 우리나라 여성들은 여전히 임신중지가 필요할 경우 안전한 약물이 아닌 수술적 방법을 택해야 한다. 가까운 병원과 약국에서 임신중지 약물을 제공받고 복용 전후에 충분한 의료상담과 의료조치를 받을 수 없다면, 임신중지가 비범죄화된들 여성의 건강과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2005년에 세계보건기구 필수의약품으로 지정된 유산유도제가 한국에선 접근이 원천 차단돼 있다는 것은 우리나라 여성의 안전과 권리가 심각히 침해받고 있다는 뜻이다.

안전한 임신중지가 가능하도록 보건의료 체계 전반을 개편하고 의료인들을 교육, 훈련해야 한다. 임신중지가 범죄화돼 있는 동안 우리 보건의료 시스템에서 임신중지를 위한 의료와 시술, 약품, 상담은 완전히 공백 상태였다. 당장 형법, 모자보건법, 의료법 등이 개정된다 해도 우리 의료체계는 임신중지를 위한 양질의 진료가 전혀 준비돼 있지 않다. 하루라도 빨리 특히 장애인, 청소년, 성소수자, 비도시 거주자 등 의료약자를 중심으로 임신중지 의료접근권을 강화해야 한다. 의료인들에게 임신중지 전반의 진료, 상담, 복약, 시술에 관한 교육과 훈련을 시작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원치 않는 임신 자체를 줄이는 일이다. 그러려면 청소년을 포함한 모두에게 정확하고 안전한 피임 지식이 제공되고 피임 자원 접근에 금전적 문화적 장벽이 없어야 한다. 성과 재생산에 관해 보호주의적 접근이 아닌 권리로서의 인식을 공유하고, 성평등하고 성역할을 지양하는 상호 존중의 관계를 만들어야 안전한 성관계와 자유로운 피임이 가능하다. 낙인 없는 피임 접근권 보장과 젠더 평등한 포괄적 성교육은 복지부, 여가부, 교육부가 당장 머리를 맞대고 구체적 실행계획을 내놓아야 한다.

헌법불합치 취지에 맞게 임신중지의 전면 비범죄화를 위한 형법, 모자보건법, 의료법 등 개정 도 물론 한시가 급하며 성평등 관점으로 세밀하고 정교한 법안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아무리 법이 바뀌어도 임신중지에 대한 정보와 의료 접근권이 떨어지고 사회문화적 제약이 현존하고 낙인이 현존하는 등 실질적 제반 조건이 준비되지 않으면, 여성의 삶에서 안전한 임신중지는 여전히 어렵고 불가능한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가장 기초적이라 할 안전하고 합법적인 임신중지의 권리를 넘어 성의 권리 재생산의 권리를 토론하고 보장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리하여 여성의 몸을 통제하고 착취하며 유지해 가는 자본주의와 가부장제를 깨트리는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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