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여행] 역사와 자연이 숨쉬는 곳 '강화'

지붕없는 박물관…선사부터 근현대사까지

유일환 기자 | 기사입력 2011/07/16 [18:13]

[강화도여행] 역사와 자연이 숨쉬는 곳 '강화'

지붕없는 박물관…선사부터 근현대사까지

유일환 기자 | 입력 : 2011/07/16 [18:13]

   
▲강화 여행 출발! 수내초등학교 4학년 6명 악동들이 강화박물관 앞에 도착했다.
외워야 하는 역사공부는 가라. 이제부터는 강화도를 찾아 살아있는 역사를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공부는 충분하다. 청동기 시대 고인돌부터 일본의 강압에 의해 맺은 강화도조약의 현장이 바로 강화다. 여름방학을 맞아 미리 떠나는 강화도 여행, 알면 보인다.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고인돌 유적은 탁자식고인돌로 덮게돌의 길이가 약 6.4m, 록 5.2m이며, 그 밑에 2개의 굄돌과 2개의 막음돌이 받치고 있었으나, 시간이 경과하면서 없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2000년 12월 유네스코에 등록된 만큼 매우 학술적 가치가 높다. 강화도에는 약 150여기의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다.

   
▲원시시대 움막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양성재 군.
   
▲수내초, 탄천초 4학년 학생 12명과 강화도로 역사체험을 떠났다. 사진 오른쪽 끝이 이번 역사체험을 이끌고 있는 오세현 강사.부근리 고인돌 앞.
바로 인근에는 강화역사박물관이 있다. 5천년 강화 역사를 체험하고 선대들을 돌아보는 역사의 장으로 고인돌의 땅, 신나는 청동기시대 탐험, 강화의 열린 바닷길 이야기, 고려 강화, 조선·근대 강화, 강화인의 삶, 자연환경의 강화 등으로 나눠 모두 7공간으로 채워져 있다.

강화읍 관청리 고려궁지는 39년간 고려왕이 머물렀던 곳으로 사적 제133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려는 고종 19년(1232) 7월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최우의 권유로 도읍을 송도에서 강화로 옮겼다. 이때 옮겨진 도읍터가 고려궁지로 원종 11년(1270) 환도할 때까지 39년간 사용되었다. 고려궁지는 규모는 작지만 송도 궁궐과 비슷하게 만들어졌다. 이후 여러 차례의 전란을 겪으면서 고려궁지는 모양이 많이 변했고, 현재는 조선시대 건물인 승평문, 강화유수부 동헌, 이방청, 종각, 외규장각 등이 복원되어 있다.
   
▲원시 시대부터 근현대사까지 펼쳐 볼 수 있는 강화역사박물관. 개화기 당시의 모습을 재현해 놓은 곳이다.

   
▲고려 궁지는 몽골에 맞선 항전 의지를 보여주는 곳이다. 이곳은 고려궁지내 있는 외규장각의 모습이다.
강화읍 관청리에는 조선 철종(1849-1864)이 왕위에 오르긴 전까지 거처하였던 용흥궁이 있다. 강화유수 정기세가 철종 4년(1853)에 지금과 같은 건물을 짓고 ‘용흥궁’이라 했다. 좁은 골목 안에 대문을 세우고 행랑채를 두고 있어 창덕궁 낙선재와 같은 소박한 분위기를 풍긴다. 궁 안에는 철종 잠저임을 기록한 비석과 비각이 있다. 지금은 내전 1동, 외전 1동, 별전 1동이 남아있다.

용흥궁 위로는 1900년에 축성한 '성공회 강화 성당‘이 있다. 강화 성당은 고요한 초대 주교가 축성한 건물로 성베드로와 바우로 성당으로 명명되었다. 당시 건축공사는 궁궐 도편수가 주도했고, 이후 몇 차례 보수가 있었으나 처음의 모습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성당터는 세상을 구원하는 방주로서의 의미를 분명히 하기 위해 배의 형상을 따랐다. 성당 건물은 장방형(넓이 4칹, 길이 10칸) 중층 구조로 전체적인 건축양식은 한국 정통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배치와 내부구조는 서양식 바실리카 건축양식을 응용하여 조화의 아름다움과 토착정신을 드러나게 했다.

   
▲조선 철종 임금이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기거하였던 용흥궁. 유민(은행초 3년) 학생이 반갑게 맞이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정통 건축 양식과 천주교의 서양식 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는 성공회 강화 성당.
불은면 덕성리 해안로를 따라 만들어진 광성보는 강화해협을 지키는 중요한 요새로 고려가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강화로 천도한 후에 돌과 흙을 섞어 해협을 따라 길게 쌓은 성이다. 조선 광해군 때 헐어진 곳을 보수하였고, 1871년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로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어재연 장군을 중심으로 용감히 항전했으나, 열세한 무기로 분전하다고 전원이 순국한 곳이기도 하다. 이때 파괴된 문루와 돈대를 1976년에 복원했으며, 당시 전사한 무명용사들의 무덤과 어재연 장군의 전적비 등을 보수 정비했다.

광성보에 딸린 원형의 광성돈대는 대포, 소포, 불랑기가 복원되어 있고, 그 주변으로 성축을 쌓았다. 신미양요 때 파괴되었던 것을 1977년 포좌 4개와 포 3문을 북원했다.

   
▲강화해협을 지키는 중요한 요새 역할을 담당했던 광성보.
   
▲용의 머리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용두돈대의 장관. 하지만 신미양요와 병인양요를 거친 역사의 슬픈 현장이기도 하다.
강화해협을 따라 용머리처럼 돌출한 자연 암반 위에 설치된 천연적인 교두보로 외곽 초소겸 포대 역할을 하던 용두돈대가 장관이다. 돈대의 불쑥 솟아나온 모양이 용머리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679년 세워져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때 치열한 포격전인 전개되었던 곳이다. 돈대 중앙에는 강호전적지정화기념비를 세웠는데, 앞면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글씨, 뒷면은 이은상 선생이 짓고, 김충현 선생이 글씨를 쓴 비문이 새겨져 있다. 이밖에 손돌목돈대, 쌍충비각, 신미순의총, 신미양요 순국무명용사비 등이 있다.

강화에는 광성보를 비롯해 12진·보가 있는데,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강화해협을 지키는 중요한 요충지였다. 볼만한 곳으로 덕진돈대와 남자오대 등을 볼 수 있는 덕진진, 제물진에 소속된 돈대로 강화읍 갑곶리의 갑곶돈대, 프랑스 극동함대, 미국 아세아 함대, 일본 군함 운양호와 격전을 벌였던 길상면의 초지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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