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구조사엔 없는 이름, 10선 시의원이 증명한 위대한 풀뿌리의 역사

최인수(한국지방행정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박사

분당신문 | 기사입력 2026/06/04 [06:09]

출구조사엔 없는 이름, 10선 시의원이 증명한 위대한 풀뿌리의 역사

최인수(한국지방행정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박사

분당신문 | 입력 : 2026/06/04 [06:09]

화려한 수치의 잔치, 그 이면에 가려진 진짜 주인공

 

▲ ‘기초의회 10선’ 고지에 오른 안동시의회 이재갑 당선자.(사진: 안동시의회)

 

[분당신문] 6월 3일 선거날 저녁, 대한민국 전역의 미디어는 일제히 거대한 숫자의 잔치를 벌인다. 방송사마다 화려한 그래픽을 동원해 16개 광역자치단체장 후보들의 실시간 희비를 점치고,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 경합지의 격전 상황을 속보로 쏟아낸다. 16개 선거구에 51명이 등록한 시도지사 선거, 226개 선거구에 570명이 출사표를 던진 기초단체장 선거, 그리고 전국 각지에서 수천 명의 후보가 맞붙은 광역·기초의원 선거까지. 거대한 권력의 향방을 쫓는 카메라의 시선은 분주하기만 하다.

 

그러나 대한민국 지방자치 헌정사상 가장 엄숙하고도 경이로운 승리는 방송사의 출구조사 화면이 예측한 화려한 요충지에 있지 않았다. 경상북도 안동시의회 의원선거 ‘라선거구’의 조용한 개표장. 그곳에서 대한민국 정치 역사를 새로 쓰는 전무후무한 대기록이 완성되고 있었다. 35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오직 주민의 삶터라는 한우물을 파며, 대한민국 최초로 ‘기초의회 10선’이라는 위대한 고지에 오른 이재갑 당선자의 이야기다. 이는 중앙 정치의 소음 속에 묻히기에는 너무도 거대하고 숭고한 풀뿌리 민주주의의 승리다.

 

암흑기를 깨운 단식, 그리고 청년 이재갑의 위대한 첫걸음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지방자치는 결코 거저 주어지지 않았다. 대한민국의 지방자치는 잔혹사라 불릴 만큼 모진 풍파를 겪었다. 1961년 군사정부에 의해 지방의회가 강제로 해산된 이후, 대한민국의 뿌리 민주주의는 무려 30여 년간 지독한 겨울 공화국 속에서 숨을 죽여야 했다. 행정은 중앙의 통제 아래 일방적으로 움직였고, 현장 주민들의 목소리는 번번이 권력의 장벽에 가로막혔다.

 

이 거대한 침묵을 깨우고 멈춰 선 역사의 시계바늘을 다시 돌린 것은 1990년 가을, 김대중 전 대통령이 감행한 27일간의 목숨을 건 단식 투쟁이었다. "지방자치 없는 민주주의는 껍데기"라는 일성으로 벼랑 끝에서 되찾아온 지방자치제도의 부활. 그 결실로 1991년, 마침내 제1기 민선 지방의회 선거가 치러졌다.

 

당시 서른일곱이라는 새파란 나이로 고향 안동에서 무소속 초선 의원으로 당선되며 한국 지방자치의 첫 페이지를 함께 넘겼던 청년이 있었다. 그가 바로 이재갑이다. 강산이 세 번 바뀌고 세대의 패러다임이 몇 번이나 교체되는 35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 그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주민들의 선택을 받았다. 청년이었던 의원은 어느새 백발의 거목이 되었고, 그의 이름 앞에는 ‘10선 의원’이라는 헌정사상 최초의 훈장이 새겨졌다.

 

여의도의 권력자들도 도달하지 못한 ‘10선’의 무게

 

대한민국 정치사를 통틀어 ‘10선’이라는 고지에 성공한 정치인은 단 한 명도 없다. 국회의장과 국무총리를 지내며 의회 정치의 거두라 불리던 고 김영삼 전 대통령도, 고 김종필 전 총리도 국회의원 9선의 기록에 머물러야 했다. 현대 정당 정치 체제 아래서 중앙의 화려한 권력을 쥐고 흔들던 불세출의 거물들도 도달하지 못한 이 전대미문의 고지를, 일당 독점의 성향이 가장 강한 대구·경북(TK)이라는 보수의 심장부에서 달성했다는 점은 경이로움을 넘어 숙연함마저 자아낸다.

 

특히 이재갑 당선자는 10선의 과정 중 무려 일곱 번을 정당의 그늘이 없는 ‘무소속’으로 살아남았다. 거대 정당의 공천장 하나만 받으면 바람을 타고 손쉽게 배지를 다는 여타의 정치인들과 달리, 그는 정당이라는 거대한 벽과 맞서 오직 주민들과 맺은 단단한 신뢰 체계 하나만으로 정면 돌파해 왔다.

 

선거철마다 합당과 탈당, 지역구 옮기기를 반복하며 생명을 연장하지만, 이재갑의 정치적 영토는 오직 안동의 골목길과 농번기의 논둑길뿐이었다. 이는 지역의 일꾼을 뽑는 기초의회 선거에서 조차 중앙 정치의 하수인으로 전락하게 만드는 '기초의원 정당공천제'의 폐단을 엄중히 꾸짖는 결과다. 정당의 간판이 아니라 오직 발로 뛰며 일하는 능력으로 자신을 증명하는 정치풍토가 왜 중요한지 이재갑의 10선이 웅변하고 있다. 이제는 중앙집권적 정당권력에 종속된 정당공천제를 전면 재검토하고, 나아가 이를 과감히 폐기하는 것까지 적극적으로 검토해야 할 시점이다.

 

매일 200km를 달리는 구형 SUV, 현장이 곧 성경이었다

 

그가 전무후무한 10선의 신화를 쓸 수 있었던 비결은 거창한 정치 공학이나 화려한 미사여구에 있지 않다. 수십 년째 타고 다니며 낡아버린 구형 SUV를 몰고 가파른 산을 넘으며 매일같이 지역구 200km를 살피는 묵묵한 성실함, 그것이 그의 유일한 정치적 무기였다.

 

그의 정치는 새벽 역전 시장의 가쁜 숨소리에서 시작해, 저녁 무렵 동네 경로당의 가난한 온기로 마무리된다. 선거철에만 반짝 고개를 숙이고 악수를 청하는 여의도식 정치가 아니라, 평소에도 마을회관의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며 주민들의 민원을 수첩에 빼곡히 적어 내려갔다. 농로를 포장하고, 상하수도 관로를 정비하며, 소외된 농민들의 농업 기반 시설을 개선하는 일. 누군가에게는 사소해 보일지 모르는 그 ‘생활의 문제’들이 이재갑에게는 민주주의의 본질이자 정치가 존재하는 이유였다.

 

"모든 문제의 답은 현장에 있고, 주민의 눈높이에 지혜가 있다"는 그의 소박한 신념은, 거대 담론에만 매몰되어 민생의 핏줄을 망각한 대한민국 정치권 전체가 고개 숙여 배워야 할 자치 행정의 살아있는 교과서다.

 

주권재민(主權在民)의 참된 가치를 증명한 거인에게 보내는 찬사

 

우리 사회의 수많은 정치인은 더 크고, 더 넓고, 더 화려한 곳을 향해 질주한다. 시의원을 거쳐 도의원이 되고, 다시 국회의원이 되어 여의도라는 중앙 무대의 중심에 서는 것만을 성공이라 믿는다. 그러나 모두가 중앙을 바라보며 출세의 동아줄을 잡으려 눈치를 살필 때, 35년간 묵묵히 주민의 삶 속에서 살아 움직이고자 했던 이재갑 의원의 집념은 참된 풀뿌리 민주주의의 영혼이 어디에 있는지를 웅변한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제2항은 명시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이 준엄한 선언은 책전(冊戰) 속의 죽은 문장이 아니다. 이재갑이라는 한 정치인이 안동의 흙먼지 날리는 현장에서 주민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흘린 땀방울을 통해 비로소 살아서 숨 쉬는 현실이 되었다.

 

더 높은 곳이 아닌 더 깊은 곳을 향했던 그의 정치는 아름답다. 대한민국 기초의회 역사의 새 지평을 연 이재갑 당선자에게 온 마음을 담아 뜨거운 축하를 보낸다. 아울러 외롭고 고단했던 자치의 외길을 걸어오며 대한민국 지방자치의 자존심과 품격을 지켜준 그의 위대한 의지와 노고에 깊은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그의 10선 당선은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거둔 가장 눈부신 승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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